“나는 마침내 현대의 전사를 만드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결합한 무술을 발견했다.”
— Michael D. Echanis
마이클 D. 에차니스(Michael D. Echanis, 1950–1978)의 생애는 불과 27년으로 짧았습니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안에 그는 베트남전의 젊은 레인저에서 중상을 입은 상이군인으로, 다시 화랑도 수련생에서 미 육군 특수부대와 해군 SEAL을 가르치는 군사교관으로 변모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화랑도는 단순한 무술이 아니었습니다. 전쟁에서 크게 다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자신의 경험을 특수전 장병들에게 전할 수 있게 해 준 새로운 출발점이었습니다.
에차니스는 1969년 미 육군에 입대했습니다. 공수훈련을 거친 뒤 베트남전에 자원해, 제75보병 레인저 C중대에서 정찰·관찰병으로 복무했습니다.
1970년 5월,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에차니스가 타고 있던 차량이 북베트남군의 매복 공격을 받았습니다. 총탄과 파편으로 양쪽 다리와 머리, 팔 등에 부상을 입었지만 그는 계속 대응했고, 지원 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전투를 이어갔습니다. 에차니스는 이 전투에서의 공로로 용맹공로훈장(Bronze Star Medal with “V” device), 퍼플 하트 훈장(Purple Heart), 전투보병휘장(Combat Infantryman Badge, CIB)과 베트남 무공훈장을 수여받았습니다.
미 육군의 수훈 기록에는 그가 여러 차례 부상을 입고도 끝까지 싸웠으며, 그의 행동이 동료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대가는 컸습니다.
샌프란시스코의 군 병원에서 여러 차례 수술과 약 7개월에 걸친 치료를 받았지만 오른쪽 다리에는 심각한 신경과 혈관 손상이 남았습니다. 1970년 12월 그는 의병 전역했고, 자료에 따르면 미 재향군인 당국으로부터 100% 장애 판정을 받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한동안 지하실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다시 걷기로 결심했습니다. 당구대 가장자리를 붙잡고 한 걸음씩 돌기 시작했습니다. 손상된 다리를 그대로 움직일 수 없게 되자 허벅지와 엉덩이 근육을 강화하고 자신만의 보행 방법을 만들어냈습니다. 결국 그는 다시 걸고 달릴 수 있었고, 무술을 수련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그의 군사훈련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육체적 기술만큼이나 정신력과 의지가 인간의 한계를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자신의 몸으로 경험한 사람이었습니다.
에차니스는 유도와 가라테, 복싱 등 여러 무술을 경험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찾고 있던 완전한 전투 체계에는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캘리포니아 다우니의 화랑도 세계본부와 이주방 도주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
에차니스가 처음 수련을 요청했을 때 이주방 도주는 그를 곧바로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서 입은 육체적 상처뿐 아니라 그가 짊어진 정신적 상처까지 고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에차니스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는 도장 밖에서 며칠을 기다릴 정도로 수련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고, 결국 이주방 도주는 그의 진심을 받아들여 그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이주방 도주는 동양의학을 통해 에차니스의 부상 회복에도 도움을 주었습니다. 에차니스는 그를 단순한 무술 스승을 넘어 정신적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받아들였습니다.
1975년 에차니스는 화랑도 유단자가 되었고, 그가 다시 군사 세계로 돌아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했습니다.
에차니스의 강점은 화랑도를 단순히 배운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베트남전에서 경험한 실제 전투와 화랑도의 타격·유술·특수무기·정신수련을 결합해 군인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는 근접전투 교육체계로 발전시키고자 했습니다.
그 가능성을 가장 먼저 주목한 곳 중 하나가 미 육군의 특수전 교육기관이었습니다.
1975년 12월, 에차니스는 포트 브래그(Fort Bragg)의 미 육군 존 F. 케네디 군사지원센터(John F. Kennedy Center for Military Assistance)에서 맨손전투·특수무기 교관학교 수석교관 겸 고문(Senior Instructor and Advisor to the Hand-to-Hand Combat / Special Weapons School for Instructors)으로 공식 임명되었습니다.
1976년에는 「화랑도 맨손전투 및 특수무기 프로그램(Hwarangdo Hand-to-Hand and Special Weapons Program)」이라는 명칭으로 총 여섯 차례의 교관 교육과정이 실시되었습니다.
그의 교육은 단순히 몇 가지 기술을 가르치는 과정이 아니었습니다.
1977년 미 육군 특수부대 관계자는 에차니스의 프로그램이 병사의 육체적 능력뿐 아니라 정신 상태와 전투 의지까지 함께 향상시키는 포괄적인 접근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당시 관계자는 자신이 접한 기존 근접전투 교범과 훈련 프로그램보다 뛰어났다는 평가도 남겼습니다.
에차니스 자신도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서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군사교육 프로그램과 교범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으며, 마침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았다고 적었습니다.
포트 브래그(Fort Bragg)에서의 활동은 이후 미 해군 특수전 부대로 이어졌습니다.
1977년 에차니스는 당시 미 해군 SEAL Team TWO 지휘관 리처드 마르신코(Richard Marcinko)의 초청을 받아 버지니아주 리틀 크릭(Little Creek)으로 이동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SEAL Team TWO와 수중폭파대(UDT, Underwater Demolition Team) 요원들을 대상으로 세 차례의 교관 교육과정을 지도했습니다. 당시 과정의 공식 명칭은 다음과 같습니다.
미 해군 실 팀 2(SEAL Team TWO) 화랑도 맨손전투·특수무기·특수전술 교관학교
(SEAL TEAM TWO Hwa Rang Do Hand-to-Hand Combat / Special Weapons / Special Tactics School for Instructors)
미 해군 문서는 에차니스를 이 과정의 상임 선임고문 겸 수석교관(Permanent Senior Advisor and Head Instructor)으로 공식 임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가 특별한 이유는 단순히 한 미국인이 한국 무술을 배웠다는 기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화랑도(HWA RANG DO)라는 이름이 미 해군 특수전 부대의 공식 교관 교육과정 명칭 안에 그대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1976년 에차니스는 미 특수부대를 대상으로 여섯 차례의 3주 교관과정을 지도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훗날 미국 최초의 대테러 특수부대 델타 포스(Delta Force)를 창설하게 되는 찰리 벡위드(Charlie Beckwith)와도 관계를 맺었으며, 첨부 자료에는 초기 델타(Delta) 요원들이 에차니스의 훈련을 참관하고 함께 수련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목발 없이는 제대로 걷기 어려웠던 상이군인이, 이제는 그린 베렛(Green Berets)와 네이비 실(Navy SEAL)을 가르치는 교관이 된 것입니다.
에차니스의 군사전투 교육은 책으로도 남았습니다.
그의 이름으로 다음 세 권의 군사 격투서가 출간되었습니다.
전투용 칼 호신술(Knife Self-Defense for Combat)
전투용 기본 봉술(Basic Stick Fighting for Combat)
전투용 칼싸움 및 투검술(Knife Fighting, Knife Throwing for Combat)
이 시리즈는 미 육군 특수부대(Special Forces), 레인저(Ranger), 수중폭파대/네이비 실(UDT/SEAL) 등을 염두에 두고 제작된 근접전투·특수무기 교육자료입니다. 첨부 자료에 따르면 당초에는 더 큰 규모의 연속 시리즈가 기획되어 있었으며, 에차니스는 니카라과에 머무는 동안에도 후속 원고 작업을 계속했습니다.
1977년 에차니스의 삶은 다시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니카라과의 아나스타시오 소모자(Anastasio Somoza) 대통령 측은 전직 미국 특수작전 요원들로 구성된 소규모 팀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에차니스는 팀 구성과 교육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이후 현지에서 군사고문과 특수부대 교육 등의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러나 1978년 9월 8일,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 국경 인근에서 비극이 벌어졌습니다.
에차니스와 동료 척 샌더즈(Chuck Sanders), 바비 응우옌(Bobby Nguyen), 그리고 니카라과의 호세 이반 알레그렛(José Iván Alegrett) 장군이 탑승한 항공기가 추락해 탑승자 전원이 사망했습니다. 에차니스는 불과 27세였습니다.
사고 원인을 둘러싸고 이후 여러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폭발물, 수류탄 사고, 기상과 조종 문제, 정치적 음모 등 서로 다른 설명이 존재하지만, 결정적인 원인은 현재까지 확정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그레그 워커(Greg Walker) — 미 육군 특수부대(Green Beret) 출신의 군사사 연구자이자 작가. 마이클 디. 에차니스(Michael D. Echanis) 가족과 오랜 교류를 바탕으로 그의 생애와 군사·무술 활동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사진은 오리건주 온타리오의 마이클 에차니스의 묘소에서 찍은 것입니다.
마이클 에차니스의 장례식에는 이주방 도주도 참석했습니다.
첨부자료는 이주방 도주가 명예 운구인으로 장례에 참여했고, 일주일 뒤 캘리포니아 다우니에서 에차니스를 위한 전통적인 추모의식을 열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젊은 군인이 화랑도를 만나 다시 일어섰고, 결국 스승에게 배운 기술을 미국 최고의 특수전 부대에 전했습니다.
그리고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이름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2013년 Michael D. Echanis는 사후 블랙벨트 잡지 명예의 전당(Black Belt Magazine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렸으며, 2017년에는 관련 자료와 기록을 바탕으로 특수부대 협회(Special Forces Association)에도 사후 회원으로 인정되었습니다.
하지만 화랑도 역사에서 그의 가장 중요한 유산은 훈장이나 명예의 전당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전쟁으로 파괴된 몸을 다시 일으켜 세운 화랑도인이었고, 자신이 배운 화랑도의 기술과 정신을 실제 특수전 교육의 현장으로 가져간 인물이었습니다.
마이클 에차니스가 남긴 이야기는 한 사람의 무용담이라기보다, 한 무도가 한 인간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고, 그 인간을 통해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전달되었는지를 보여주는 기록입니다.
2013년, Michael D. Echanis는 사후 《Black Belt Magazine》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올해의 무기술 교관(Weapons Instructor of the Year)’으로 선정되었다. 사진 제공: Greg Walker.
1950.11.16 — 1978.09.08
Wounded Warrior. Hwa Rang Do Practitioner. Special Operations Instructor.